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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6일(금)일자 조선일보에 우리 교회 관련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2025-09-27 13: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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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5. 09. 26. 인터넷신문]

“하나님 앞에선 귀천 구분 없다”… 116년 전 양반·백정이 함께 앉았다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13> 진주교회와 호주 장로교

 

진주교회(오른쪽)과 비전관. 가운데 종탑은 진주 3.1운동의 신호탄이 된 진주교회 종소리를 기념해 세워졌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오른쪽)과 비전관. 가운데 종탑은 진주 3.1운동의 신호탄이 된 진주교회 종소리를 기념해 세워졌다. /김한수 기자
“오늘 밤 그의 안에 있는 사자는 길들여져 있었다(The lion in him was tame tonight).”

1909년 7월 31일. 경남 진주에 파송된 호주 장로교 여성 선교사 켈리는 선교본부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약 3개월간 진주교회를 극심한 내홍으로 몰아넣었던 ‘백정 동석(同席) 예배’ 파동이 좋은 결말을 맺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격렬히 반대하던 교인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이 희소식을 가져온 것.

 

1914년 진주 배돈병원에서 열린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연례회의에 선교사와 가족들이 모였다. /진주교회 제공

1914년 진주 배돈병원에서 열린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연례회의에 선교사와 가족들이 모였다. /진주교회 제공


발단은 그해 부임한 라이얼(1876~1921) 선교사의 방침이었다.
백정들에 대한 전도는 전임 커를(1871~1943)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지만 예배는 따로 드리고 있었다.
당시 백정에 대한 사회적 천대는 대단했다.
돈이 있어도 기와집·비단옷은 금지됐고,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써야 했으며 길을 앞질러 가는 것조차 금지됐다.
안식년을 맞아 병원 건립 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한 커를 후임으로 온 라이얼은 신분 차이로 예배를 나누어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다. 많은 신자가 “시기상조”라고 말렸으나 라이얼은 밀어붙였다.
5월 초 백정 15명이 예배에 참석했다. 난리가 났다. 교인 300명 중 200명가량이 교회를 떠났다.
당시 교회는 설립 4년 만에 주일 예배를 2부로 나눌 정도로 부흥하던 중이었는데 찬물을 끼얹은 셈.
라이얼 선교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존비귀천지별이 없다.” “사람을 기쁘게 함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함이 옳다.”
“떠드는 많은 사람을 요구하지 않고 두세 사람이라도 참 믿는 자를 요구한다.”

 

1910년 호주 해외선교위원들이 진주를 방문해 기념촬영한 사진. 뒤에 보이는 건물이 1906년 건립된 예배당으로 이곳에서 백정 동석 예배가 이뤄졌다. /진주교회 제공

1910년 호주 해외선교위원들이 진주를 방문해 기념촬영한 사진.
뒤에 보이는 건물이 1906년 건립된 예배당으로 이곳에서 백정 동석 예배가 이뤄졌다. /진주교회 제공

 

진주교회를 설립한 호주 선교사들이 1913년 신축한 배돈병원.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지역에 서양식 근대 의학을 소개했다. /진주교회 제공

진주교회를 설립한 호주 선교사들이 1913년 신축한 배돈병원.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지역에 서양식 근대 의학을 소개했다. /진주교회 제공

 

‘강(强) 대 강’으로 치닫던 사태는 켈리와 스콜스 등 여성 선교사들이 양측을 오가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면서 해결점을 찾았다.
백정들은 7월 25일 자신들의 예배처로 돌아갔고, 양반들이 교회로 돌아와 예배를 드렸다.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벌어졌다.
떠났던 교인들은 자기들 체면을 세워준 것을 고마워하며 7월 29일 회의를 열어 백정들과 함께 예배 드리기로 결정한 것.
마침내 1909년 8월 1일 역사적인 백정 동석 예배가 열렸다.
앞의 보고서는 이 동석 예배 직전 상황을 보고한 것.
이 사건은 1923년 백정들의 인권운동 ‘형평사운동’이 진주에서 태동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
진주교회 앞엔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표지판이 서있다.

 

진주교회에 설치된 '백정 동석 예배' 기념 표지판. 진주교회와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웠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에 설치된 '백정 동석 예배' 기념 표지판. 진주교회와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웠다. /김한수 기자


서부 경남 최초의 교회인 진주교회는 1905년 의사인 커를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진주는 ‘기생 수가 파리만큼 많다’(‘진주교회 연혁사’·1930년 발간)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복음과 근대 문명을 소개하며 진주 풍경을 바꿔 놓았다.
교회 설립 이듬해인 1906년 안동남학교와 정숙여학교를 세워 무료로 가르쳤고 1907년엔 서점(진양서관)도 열었다.

 

진주교회가 설립한 시원여학교의 1929년 졸업기념 사진. /진주교회 제공

진주교회가 설립한 시원여학교의 1929년 졸업기념 사진. /진주교회 제공

 

진주교회가 설립한 기독유치원 원생들과 교사들. /진주교회 제공

진주교회가 설립한 기독유치원 원생들과 교사들. /진주교회 제공

 

 

1930년대 진주 시가 전경. 주택가 중간에 진주교회(첨탑 건물)와 진주고(위쪽 운동장 있는 건물), 시원여학교(아래쪽 운동장 있는 건물)가 보인다. /진주교회 제공

1930년대 진주 시가 전경. 주택가 중간에 진주교회(첨탑 건물)와 진주고(위쪽 운동장 있는 건물),
시원여학교(아래쪽 운동장 있는 건물)가 보인다. /진주교회 제공


1911년엔 진주기독유치원, 1913년엔 배돈병원을 세웠다.
자녀에게 한글, 산수, 영어 등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들이 선교사를 찾아왔고,
환자들도 서양 의사가 있는 배돈병원으로 몰렸다.
이렇게 ‘교육·의료 도시 진주’의 기틀이 마련됐다.
경술국치 때에는 교사와 학생이 하루 종일 통곡했고(한규상 ‘나의 조국 나의 교회’),
1919년 3월 18일 진주만세운동은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됐다.

호주 장로교는 미국 장로교에 비해 가난했다. 1942년까지 한국에 온 호주 선교사는 78명.
그중 여성이 54명으로 다수를 차지한 것도 미혼 여성 선교사들에게 지급하는 선교비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여성 선교사들은 배돈병원과 학교, 유치원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호주 선교사들이 ‘공창제(公娼制) 폐지 운동’에 앞장선 것도 이들이 배돈병원에서 여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진주교회 비전관 표지석. 진주교회를 설립한 호주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호주 대륙 지도 모양으로 제작됐다. 호주 선교사 후손들은 이 표지석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 비전관 표지석. 진주교회를 설립한 호주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호주 대륙 지도 모양으로 제작됐다.
호주 선교사 후손들은 이 표지석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는 호주 선교사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2011년 건립한 비전관의 영문 이름은 ‘커를 선교사 기념 비전 센터’로 지었고, 표지석은 호주 대륙 지도 모양으로 만들었다.
선교사 후손과의 교류도 이어지고 있다.
110주년 때에는 커를 선교사 외손자가 교회 초청으로 방문해 외할아버지의 여권을 기증했다.
정신과 의사 매클렐런 선교사의 딸 레이철은 1923년 진주에서 태어났는데,
2007년 호주에서 별세하면서 진주에 묻어 달라고 유언해 교회 묘지에 안장되기도 했다.

 

진주교회 정문엔 올해로 120년 된 이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 동판들이 설치돼 있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 정문엔 올해로 120년 된 이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 동판들이 설치돼 있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 게시판. 영아부부터 청년부까지 주일학교 일정이 빽빽할 정도로 이 교회는 주일학교가 활성화돼 있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 게시판. 영아부부터 청년부까지 주일학교 일정이 빽빽할 정도로 이 교회는 주일학교가 활성화돼 있다. /김한수 기자

 

진주교회 종탑 앞에 선 송영의 담임목사(왼쪽)와 조헌국 장로. 조 장로는 '진주에 뿌려진 복음' '호주 선교사 커를과 그의 동료들' 등의 저서로 진주교회 역사와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업적을 알리고 있다. /김한수

진주교회 종탑 앞에 선 송영의 담임목사(왼쪽)와 조헌국 장로.
조 장로는 '진주에 뿌려진 복음' '호주 선교사 커를과 그의 동료들' 등의 저서로
진주교회 역사와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업적을 알리고 있다. /김한수 기자

 

120년 전 선교사들이 어린이와 청소년을 돌봤듯이 교회는 다자녀 지원금과 장학 제도를 통해 미래 세대 양육에 힘쓰고 있다.
덕분에 주일학교가 활성화돼 매주 400~500명이 출석할 정도. 주일 예배 출석 인원도 900명에 이른다.
교회는 10월 18일 호주 장로교 선교 120주년을 맞아 학술 발표회와 교회 120년사 출판 감사 예배를 갖는다.
또 진주 시민들이 추진하는 호주 선교 역사관 건립에도 앞장서고 있다.

/진주=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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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윤동한 2026-02-11 00:31:15
샬롬, 존경하는, 사랑하는 교회 가족 여러분께 이렇게 제 개인적인 사정을 전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신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4평남짓한 작은 원룸에서, 교회가는 것을 저보다 더 좋아하는 귀엽고 이쁘지만 너무나도 속 깊은 장한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젊은 아빠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아플 예쁜 딸과 함게 너무나도 행복할 것 같던 제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며 어른을 공경할줄 아는 너무나 대견한 딸을 지켜주고 싶어 매일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몇년전, 가정과 딸에 무관심했던 아내와의 가치관 차이로 결국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혼을 하였습니다. 이혼을 최종적으로 하며 가정법원에서 돌아오던 날,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집으로 오며 흘렸던 눈물이 벌써 3년 전의 일입니다.. 그 후로는 저는 소중하고 너무나도 예쁜 저의 딸이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 없이 홀로 자라 가족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꿈자 목표였습니다. 잠시나마 가정을 이루어 예쁜딸도 갖게 되고, 딸과 함께 그 꿈을 이루어 행복할 지 알았지만 가정에 관심이 없던 그여자와 이혼을하며 저는 꿈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이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의 예쁜 딸아이만큼은 저처럼 불행한 삶을 겪게 하지 않으려 하루 15시간 이상 일을 계속했습니다.. 공장을 다니며 퇴근하고는 배달아르바이트를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정말 너무나 힘이들고 괴로웠지만, 집에 돌아와 천사 같이 자고있는 아이 얼굴을 보며 다시 힘을 냈습니다.. 너무나 고되고 힘들 날들이였지만 저에겐 이루고 싶은 작은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겨내며 살았습니다. 저의 소원은 곧 있으면 클 딸에게 자기 방이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며 악착같이 살아가던 중, 얼마 전 비가 너무나도 많이 오던 날 배달을 나갔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날따라 점잖고 늦은밤에도 자기를 혼자두고 일을 나가도 이해해주던 딸이 천둥번개 소리가 너무 무섭다며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할 생활비 때문에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 후 의사는 많이왔던 비 덕분에 미끄러지며 충격이 많이 줄어 다행이라 했지만, 저는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까지 스쳤습니다.. 왜냐하면 또다시 톱니 바퀴 같은 삶을, 너무나도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을, 다시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회복하면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건 감사했지만, 몇 일전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생활은 무너졌습니다.. 이혼하기 전 아내와 빚을 내 마련했던 작은 가게가 코로나와 겹치게 되며 많은손해를 보며 폐업을 하였고.. 그때 생겼던 빚들을 아직 해결을 못하여 계속 조금씩 연체되며 힘들게 갚아 나가고 있었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치고 회복하는동안 결국 채무로 인해 통장이 압류되고, 생활비조차 꺼내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손에 쥔 돈은 5만 원도 되지 않아, 그걸 쪼개며 2주를 버텼습니다. 저는 거의 굶으며, 아이는 라면 한 봉지를 나눠 먹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라면 한봉지를 3등분으로 나누어 조금씩 끓여주고 저는 딸이 먹고 남은 국물을 조금씩 먹곤 하였는데 이렇게 산다는게 너무나 비참하고 괴롭웠습니다.. 지금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힘이듭니다.. 딸을 대리고 깁스를 한채로 은행을 가보았지만 당장 압류된 돈을 찾을 수 없고 재판을 통해 회생신청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법무사를 통해 회생을 신청하려 해도 150만 원이 넘는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고, 설령 신청한다 해도 몇 달은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날 적 부터 기관지가 안좋던 딸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며칠 전부터 심한 기침과 인후통으로 매일 아파하며 울며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당장 병원에 데려갈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 아빠로써 정말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저 해줄수 있는거라곤 물을 끓여 조금씩 식혀서 통증을 가라 앉히며 괜찮아지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음에 가슴이 너무나도 아픕니다.. 이렇게 비참히, 아무것도 할수 없는 제 현실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제 자신이 과연 이 사회에 , 아버지로서 살 자격이 있는지 글을 적으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저는 정말 ..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모든것을 내려 놓고.. 저를 위해 만원한장도 쓰지않고 먹고 싶은것 놀고 싶은 것 아무것도 하지않으며 오로지 딸과 행복할 미래를 생각하며 돈이 되는일은 힘이 들고 피곤하여도 나가서 일을 하고 절약하며 작은 방이 딸린 작은 전세집이라도 얻기위하여 절약하며 살아왔지만 현실에 무지하고 언젠간 갚아야할 빚이라고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무지했던 제가 결국은 이렇게 힘든 상황을 맞게 된 것 같습니다.. 어디 말할 가족도, 친구도 없이 이렇게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읽어 주기를 바라며 적는 이 현실이, 어느 천사 같은 분이 계셔서 읽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글을 적어가고 있는 제가 과연 이 사회에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염치 없지만, 그리고 너무나도 죄송하지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평생 잊지 않고 반드시 은혜갚겠습니다.. 몸이 회복되고 압류가 풀리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이라도 몸이 낫는다면 일을 다시 하여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 전부이자 삶의 이유인 딸을 걸고 하늘에 약속드립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늘에 맹새합니다.. 며칠 뒤면 예쁜 딸의 생일입니다. 라면 대신, 그저 따뜻한 밥 한 끼와 미역국 한 그릇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얼마전부터 치킨이 먹고싶다며 소원이라던 딸을 대리고 일부러 치킨가게가 없는곳 외진곳으로 걸으며 예쁜 딸에게 치킨가게가 없어 못사준다는 너무나 부모로써 부끄럽고 미안한 거짓말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딸 몰래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그날 딸과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옆에는 딸의 이쁜작은손이 제손을 꽉잡고있고, 모든걸 포기하고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작은 손길이 제 마음을 너무나 괴롭고 미안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해줄수없는 이현실에 여리고 예쁜 딸을 과연 제가 키울 자격이 있는지조차 스스로 의문이 듭니다.. 너무나 힘이듭니다.. 살고 싶습니다. 이겨내고싶습니다.. 너무나 염치 없고 죄송하지만,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부디 .. 부탁드립니다.. 은혜를 주신다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몸이 회복되고 일을 하며, 법적절차를 통해 통장 압류가 풀리게 된다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통장이 풀리지않아도 몸이 조금만더 괜찮아지고 다리에 깁스만푼다면 저는 그랬던것처럼 일을 매일 해야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제 딸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그리고 그 곁에서 제가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의 평안과 건강을 진심으로 기도드리며, 부족한 아버지가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잊지않겠습니다 평생..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바위에 새기라 하였습니다.. 평생 딸과 기억하며 은혜갚겠습니다. 너무나 힘이듭니다.. 어디말할곳도 의지할곳도 없는 저는 더이상 버틸수가없습니다.. 너무나. 외롭고. 힘이듭니다..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부디 아픈 딸을 위해.. 매일 작은손으로 하늘에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딸을 위해 못난 아빠가 할수있는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새 마을 금고 9003 ㅡ 29882 ㅡ 5985 [윤 동 환] 부디 이 마지막 기도가 ..하늘에.. 그리고 사랑하는 존경하는 가족분들께 닿기를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큰 은혜는 평생 딸과 함께 잊지않고 살아가며 마음 깊이 새기고 다시 갚아가겠습니다.. 창밖 세상 속 행복한 사람들, 어느 가족들이 행복하게 대화하며 걸어 가는 모습들은.. 마치 저와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고, 절망 속에서 글을 올리는 지금 이 순간조차 너무나도 참담합니다. 그동안 눌러온 고통이 매일 저를 짓누르고,이제는 제 마음까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제 곁에서 아빠 얼른 나아지게 해달라 매일 기도하는 어린 딸을 보며 또다시 버티고 있습니다. 차라리 제가 없다면 지금 사회복지는 어쩌면 제가 혼자 자랐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아졌을테니 제가 없는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어쩌면 무능한 저와 함께 지내는 지금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딸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는 힘닿는 데까지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늘에.. 그리고 가족분들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혹시라도 이글을 읽고 도움을 주시는 천사같은 분이 계신다면, 제 딸과 함께 평생 잊지 않고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새 마을 금고 9003 ㅡ 29882 ㅡ 5985 [윤 동 환] 다가오는 명절에도 주님안에서 모두 따뜻하고 행복하신 시간들 보내시길 하늘에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지막 기도가 하늘에 그리고 가족분들께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예쁜딸의 너무나 부족한 못난 아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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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KBS인간극장18.10.22]93세 닥터 한과 인생 병동’ 5부-한규상 선생 따님 한원주 권사 신집사 2021-08-20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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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경남일보 21.08.19] ‘진주에 뿌려진 복음’ 개정판 발간    신집사 2021-08-20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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